세계는 반사하고 있기도 없기도
박보마
서문
(ㄱ) 도착적인 신, 세계의 폐쇄성(시작과 끝이 없으며 나누어 열어볼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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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적인 신, 세계의 폐쇄성(시작과 끝이 없으며 나누어 열어볼 수 없음)
(…) 그와 같은 숭배는, 즉 간청과 탄원과 예물과 아첨은 신에게 어떠한 정념이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인가? (…) 이제, 간청과 탄원과 예물과 아첨에도 불구하고 신이 계속해서 우리를 냉대한다는 것에 우리가 아직도 놀란다면, (…) 즉 우리가 신에게 칭송과 아첨에 대한 욕망을 귀속시킴으로써 동시에 우리와 우리의 의견에 대한 무시 또한 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임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그때 우리는 숭배를 통해 신의 은총을 얻고자 노력할 때 신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 냉대와 분노와 경멸 등등인 것이다. (…) 그들의 “터무니없고, 미신적이며, 심지어 불경하기까지 한” 숭배는 신의 지위를 "간청, 애걸, 선물 그리고 아첨에 기뻐하는 인간 종족의 저급한 조건으로 “떨어트린다(88[129[)". (…) 신은 도덕적 속성들이 없는 신이며, 인간적 정념들이 없는 신, “전적으로 무관심한” 신이며, “악보다 선을, 냉보다 열을, 습보다 건을,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우위에 두지 않는다“(75[111]).(…) 우리가 그에게 복종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죄가 있다. 그의 계명을 충실하게 따르면 따를수록 그는 더욱더 우리를 경멸한다. (…) 우리는 가장 저급한 인간 정념들 가운데 하나를, 즉 칭송과 아첨에 대한 욕망을 그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 비록 신을 믿지 않더라도, 마치도 이미 믿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러면 믿음이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 반면에 흄적인 철학적 유신론자는 신을 믿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
- 미란 보조비치, 『암흑지점』, ‘복장도착자들의 신 - ……도착적 신까지’, p30-39
느슨하게 말해 세계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 세계는 밀면 당기는, 나오면 들어가는, 부풀면 터지는, 느슨하면 조이는 그런 때들을 만든다. 인간이 신이라 부르는 신은 부르는 동시에 세계에 포함되어 있어서, 그 ‘도착적인 신’을 이해한다. 세계가 만드는 그런, 저런 때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감각적, 감정적 사건들로 구성된다. 이 발표문은 많은 감각들 중에 망막에 맺히는 반사된 빛의 감각과 심상을 중심으로 반사체, 반사로서의 세계를 다룬다.
광원의 지위가 만드는 복사 광-반사광의 하위 개념들, 반사광은 진짜 빛(광원)없이 존재할 수 없는 가짜 빛(복사된 빛)인가? 현재 지금이 ‘상영 중’이라는 걸 암시하는 복사 빛으로서 세계, 매질의 매끄러움으로 인해 빛의 흡수보다 반사가 더 많이 일어나, ‘광원’의 빛을 거의 다 토해내며 망막을 하얀 날로 할퀴고, 꾸욱 눌러, 검정색의 잔상을 남기는 빛의 암시… 에너지가 부딪혀 튕겨 나오고 또다른 것과 조우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반응(파동)과 사건(입자)으로서, 세계의 속, 안, 깊이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얼만큼 깊이에 있다는 걸 조망할 수 있는가? 세계와 사물의 속을 안다고, 아는 듯 말하는 외부는 여전히 외부가 아닌가? 세계를 어디까지 자르고 나눌 수 있을까? 우리는 ‘광원’을 대면한 적이 있는가?
찰나의 우연, 무관심한 시간만이 민망하지 않다. 빛이 비추는 곳은 (비로소) 무대가 되어, 펼쳐진다(the virtual[1]). 지금 빛나지 않지만 언제라도 빛날 수 있는 것이 여기, 저기에 널려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 아직 빛을 받지 않은 객체(potential object[2])는 우리에게 윤리를 쥐여준다. 수많은 시차가 서로를 이어 순환하는 고리로서 존재한다. 무대가 시작하면 무대의 시간은 이제 입자로 흩어져 사라지고 다시 빛의 가능성이 된다. 이로써 세계에 무대 아닌 것이, 무대 아닌 때가 없는데, 그것은 모두가 아주 작은, 겹쳐진, 동떨어진 무대로서 빛 발하고 전하고 멸하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무대는 그 자체의 오고 가는 파동의 양과 역할에 이유 없이 반응하고 순환하기 때문에 사사로운 시공간을 초월한다. 이러한 초월적 질서 밖에 있는 것은 없다. 무대로서의 세계들은 서로 간에 무엇이 무엇을 의지로 멈추고, 의도하여 나누어 까서 보거나 멋대로 감각할 수 없다.
2009년의 <눈물층 탐구>는 파워포인트를 활용한 발표형식의 작업으로 눈물로 인해 빛을 반사하는, 반짝이는 눈과 거울의 유사성을 풀어본 작업이며, 이번 기회에 다듬었다. 2009년의 <골짜기 빛 무대 스케치>는 LED로 폭포수를 무대에 구현하는 작업으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설치 작업 <골짜기 빛 무대>를 위한 드로잉 스케치이다.
[1] 레비 R. 브라이언트, 『객체들의 민주주의』, 3장 잠재적 고유 존재, p129,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성질을 소유하지 않은 채 포맷되거나 조직된 실체의 이런 차원을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이라고 일컫는다.’ [2] Levi R. Bryant, (2011) The Democracy of Objects: Chapter 3: Virtual Proper Being 9. (Michigan: OPEN HUMANITIES PRESS), p. 95.
(ㄴ)
(ㄷ)
이 글은 시각문화학회에서 진행한 스터디 그룹, '머티리얼 스터디'의 지난 활동을 기록한 자료집,
『머티리얼 스터디』, 2022, YPC PRESS. 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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